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문단 편집) === 분석 === ||<-5> '''무소속 당선자들의 복당이 가능한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 || ||<-1> [[민주당계 정당|민주당계]] 98석 ||<-2> [[제3지대]] 정당 32석 ||<-1> [[대한민국 보수정당|보수정당]] 169석 || || '''[[민주당(1991년)|{{{#white 민주당}}}]]''' || [[신정치개혁당|{{{#white 신정치개혁당}}}]] || '''[[통일국민당|{{{#ffffff 통일국민당}}}]]''' || '''[[민주자유당|{{{#ffffff 민주자유당}}}]]''' || || 98석 || 1석 || 31석 || 169석 || 개표 초반에는 [[민주자유당]]이 충분히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2/1912029_13444.html|과반을 확보할 것 같았고]], 반대로 민주당과 통일국민당은 별 힘을 못쓰고 참패할 듯 보였으나[* 여기서도 군 부재자 투표 부정 선거가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개표 편의상 관례적으로 일반 개표보다 손이 많이 가는 부재자 투표를 맨 먼저 시작하기 때문에 보통 개표 초반에 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전투표]]로 제도가 바뀐 현재도 이 관례는 유지 중이나 관외 사전투표 참여자가 너무 많아서 봉투 자르다 시간을 다 잡아먹기 때문에 맨 먼저 시작해도 보통 맨 나중에 끝난다.) 참고로 1년 전에 치러진 [[1991년 지방선거]]에서는 신민당과 민주당, 민중당이 개표 초반에 상당히 선전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개표 중반을 넘으면서 판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민주자유당은 과반수에 1석 모자라는 149석 확보에 그쳤다. 숫자로만 보면 참패까진 아닌 것 같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200석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확보했던 민자당으로선 그야말로 대참패를 했다. 더군다나 접전 끝에 민자당이 겨우 가져간 지역구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부재자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으면 단순 과반미달 수준을 넘어 더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특히 총선 직전 기준으로 보자면, 공천 문제로 상당수 의원들이 무소속으로 탈당하였음에도 194석의 의석을 지니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45석'''이나 날려먹은 셈이 되었다. 무난히 이길 것으로 보였던 [[대경권|TK]]와 충청, 강원도에서 공천 탈락자들이 국민당이나 무소속 후보로 나오는 경우도 속출하고 일부 공탈자들이 의원에 당선되면서 해당 지역의 의석을 잃은 것도 패인이었다. 또 선거 막판에 터진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 때문에, 전통적으로 민자당[* 정확히는 [[상도동계|김영삼계 정당]]을 지지하는 [[우파#s-4.1|자유주의 우파]] 성향]을 지지하던 [[고소득층]]과 [[중산층]]의 표심이 강남3구에서는 민자당 지지에서 일시적으로[* 8개월 후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평소의 지지양상과 마찬가지로 [[민주자유당|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결집했다.] 이탈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강남3구]] 6개 선거구 중 자기 지역구에서의 지지 기반이 확고한 [[서초구 을]]의 [[김덕룡]] 의원만 승리했다.[* 그마저도 보수표 분열로 인해 500여 표 차이의 신승이었다.] 나머지 5곳의 경우, 또 다른 보수계 정당인 통일국민당이 2곳([[강남구 갑]], [[송파구 갑]]), 군소 보수정당 [[신정치개혁당]]의 스타 정치인 [[박찬종]]이 1곳([[서초구 갑]]), 보수표 분열로 인해 김대중계가 1곳([[송파구 을]]), 민주당 소속이긴 했지만 제3지대[* 범보수계나 [[동교동계|김대중계]]가 아닌] 후보로 인식되었고 지역구 지지 기반이 확고했던 홍사덕이 1곳([[강남구 을]])을 가져갔다. 한편 [[민주당(1991년)|민주당]]은 비록 호남 의석 2석을 민자당에게 내주기는 했지만 서울에서 25석, 경기도에서 8석을 확보하며 수도권에서 의석을 대폭 늘리고, 충청권에서도 대전 2석, 충남 1석, 충북 1석 등 총 4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사실상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며 선전했고, [[통일국민당]]은 31석을 확보하는 돌풍을 기록하며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민주당은 경기와 충청 지역에 의석을 확보했지만 영남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고, 통일국민당은 종로에서 [[이내흔]] 후보가 바싹 민주당을 추격하고, 서울(강남갑의 [[김동길]], 송파갑 [[조순환]]), 경기[* 수원 장안, 광명, 과천-의왕, 구리, 김포-강화. 도농 선거구들의 경우 당선자의 연고에 따른 의왕([[박제상(1935)|박제상]]), 김포([[김두섭]]) 쪽 표심 영향이 컸다.], 강원, 충청, 대구와 경남북에서 고르게 의석을 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통일국민당이 최후의 승자인 셈이었다.[* 민주당은 개헌 저지선 확보에는 실패하여 완전한 승리라고는 할수 없다.] 반면 [[신정치개혁당]]과 [[민중당(1990년)|민중당]]은 청년층에게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으나, 신정치개혁당은 1석 확보에 그쳤고 민중당은 의석(득표율은 1.5%)을 확보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이는 지금과는 달리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을 따로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200석도 훌쩍 넘기던 초거대 여당 민자당이 야당에게 129석, 무소속에게 21석이나 내줬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선거의 영향으로 안 그래도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노태우 정권은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사실상 선거판을 주도한 김영삼은 민정계 등 민자당 내 타 계파로부터 책임론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김대중은 97석의 야당대표로서 명예회복을 하며 대권 주자 자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정주영은 일약 유력 제3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김영삼은 오히려 선거의 책임을 자신에게 비협조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민정계에 돌리면서 당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민자당 대권 후보에 무난히 선출되었고, [[초원복집 사건]] 등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선거에서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초경합이었던 판세가 역전되어서[* 의외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선거 운동 기간 중에는 김영삼 후보가 1위였지만 김대중 후보와의 격차가 선거날이 다가올수록 줄어들어서 막판엔 김대중 후보와 1~3% 격차로 초박빙을 벌여나가던 상황이었고, 3위였던 정주영과 박찬종 후보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으며 부동층도 30%에 이를 정도였기에 막판까지 선거 판세를 예측하기 힘든 상태였다.] 여유있게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한편 박찬종 대표가 당선되며 1석을 건진 신정치개혁당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도 3김 정치에 신물나 있던 청년층을 파고들어 박 후보가 6%의 득표율을 확보하며 나름 선전하나, 혁신(진보)정당을 내세운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1명의 당선자도 못내며 정당법에 따라 해산하고 이후 무소속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백기완]]도 저조한 득표력을 보이며 빛을 바랜다. 그리고 이 여파로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97년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전신)이 구성될 때까지 약 5년간 진보정당은 재건되지 못하는데, 이것은 일부 민중당 당직자들이 훗날 [[YS]]정권 시절 보수정당으로 입당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 입당한 인물 중 유명인사론 [[이재오]], [[김문수]]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